스스로의 장점에 대해 생각하기 어려워서 일단 친구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아래는 친구들이 말해준 리스트

1. 언어감각이 뛰어나다 - 그래서 그 언어감각을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살리는 말에 쓰기도 한다. 
2. 멋진 것을 탐지해내는 취향 레이더를 가지고 있다. -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분야(옷, 음악, 소품 등)의 다양한 것들을 디깅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 점 때문에 돈을 많이 쓴다. 
3. 탐구력이 좋다. - 대상의 특징을 잘 캐치해내는데 이건 아마도 내가 그 대상들에 대해 관심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피곤하기도 하다.
4.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일단 해 본다. - 무언가가 하고 싶으면 참지 못한다. 그래서 여러 가지를 도전해 본다. 그걸 끝마치는 능력은 쫌 부족해서 벌려놓은 일은 100갠데 마무리한 건 없다.
5. 멘탈이 강하다. 멘탈이 강한지는 모르겠는데 하루하루 강해져 가고는 있다 (노비로 이리저리 구르면서..) 금주엔 내 전임자가(10년차 대리, 이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게 돼서 나는 입사 한 달만에 팀이 바뀌어서 그 사람이 하던 모든 일을 인수인계 없이 바로 넘겨받았고 머리 퍽퍽 치면서 능히 해낸다 모드 중) 어머니 암 말기라며 한국 들어간다더니 아직도 모스크바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사실을 알았는데 이걸 알고도 그냥 헛웃음 짓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박박 화내거나 울었을 텐데.... 그래도 이 자를 죽이겠다는 마음은 변치 않는다
6. 모든 일에 주도적이다. - 성격이 급한 탓에 답답함을 잘 참지 못해서 스스로 많이 해나가려는 편이다. 그래서 주도적이라고 비춰진 것 같다. 
7. 귀엽다. (ㅋ)
8. 오렌지색이 잘어울린다 -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칭찬이자 스스로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sun-kissed 라는 수식어를 스스로의 슬로건으로 밀고 있다. 오렌지 머리, 오렌지색 옷, 오렌지 암튼 다 좋아~
9. 존재 자체로 본새난다 (??)
10. 격해질 수 있는 상황에 감정 컨트롤해서 참을 줄 안다. (그렇지만 가끔 격할 필요 없는 상황에서 격해진다 ㅎ)
11. 호기심이 많다.
12. 자기객관화를 잘 한다. (=스스로의 분수를 안다)
13. 이타적이다. 
14. 절대음감을 갖고있다. 노래를 잘 부르고 피아노를 칠 줄 안다!
15. 친해지면 마음을 잘 연다.

여기서부터는 스스로 생각해 봤다.

16. 회복탄력성이 높다. 마음이 변화무쌍해서 작은 일에도 기분이 잘 바뀌지만 다시 말해서 곧바로 회복한다는 뜻. 그리고 점점 스트레스에 잘 대처해 나가고 있다.
17. 스스로의 스트레스 회복 수단이 있다.
- 뜨거운 샤워 후 술 말아서 좋아하는 향수 침대에 뿌려놓고 누워서 멍때리기, 디제잉 연습, 달리기 글고 책 읽기
18. 정이 많다. 그래서 관계에 있어서 잘 상처받기도 한다.
19. 많은 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한다. 가끔 좋아하는 사람의 말버릇까지도
20. 아날로그 친화적이다. 그래서 더 많은 매체를 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21. 넓은 세계를 살아가고자 노력한다. 
22. 잠을 잘 잔다. 너무 잘 자서 탈이지만
23. "여자치고^^" 롤을 잘 한다. 난 리그오브레전드를 너무 좋아해서 시즌 2부터(중2였다..) 쭉 플레이하고 있다. 만년 골딱 플딱이지만 암튼 꽤 잘 한다. 물론 여자^^ 치고.. 이 코멘트를 들을 때마다 성별 상관없이 존나 잘 하고 싶단 생각을 하지만 피지컬 뇌지컬 다 딸려서 그건 안 되더라. 쩝
24. 관심있는 분야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알아본다. 
25. 노래부르고 춤출 줄 안다!!!!!
26.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정신 건강 몸 건강


27. 격변하는 시대에 태풍의 최전선에서 살고 있다 (하하)
28. 나에게 해로운 사람을 걸러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29. 디제잉 기계가 있다. 어제 삼 ㅋ
30. 20대 중반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은 낭만(=철없음)이 있다 ~
31. 맛있는 크림 파스타를 요리할 줄 안다.
32. 숫자에 연연하는 삶을 살지 않도록 노력해 나가고 있다.
33. I이지만 때에 따라 E의 자아를 발현시킬 줄 안다.
34.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곁에 있다 !
35. 누구에게든 인사를 잘 한다.
36. 집이 더러워도 참고 살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 청소를 뒤지게 안한다)
37. 소비의 요정이다 (= 돈을 많이 쓴다.. 분수에 맞지 않는 소비)
38. 수영은 못 하지만 여름을 즐길 줄 안다.
39. 자존심이 세다. 이것은 대체로 난제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뭔가 꾸역꾸역 해내게 하는 능력이 된다. 
40. 책을 많이 읽는다. 비록 장르가 편향되어 있을지라도..

41. 기록을 좋아한다. 사진이든 글이든 뭐든 어떠한 형태로 나를 남겨 놓는 작업이 좋다!
42. 필름카메라를 종종? 잘? 사용한다. 
43. 정이 많다. 그래서 사람을 한 번 좋아하면 심각하게 좋아하고 혼자 상처받음
44.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꼭 마음속에 인지하고 있으려 노력한다.
45. 취향의 물건들에 돈을 가감없이 쓸 수 있다. 
46. 체모가 없다 와하하~~~~~ 태어나서 팔다리 제모를 한번도 안 해봤다.
47. 나름 건강한 편이다. 지병이 없다. 
48. 승부욕이 강하다. 특히 몸 쓰는 거 말고 머리 쓰는 데에!
49. 여태까지 쓴 일기를 모두 갖고 있다. 웹에도 있고 실물 일기장도 있는데 이것들은 내가 힘들 때 큰 도움이 된다.
50. 김승일 시인을 좋아한다. 

51. 죽음에서 사로잡혔다 벗어나서 이제는 행복을 향유할 줄 안다~
52. 51과 같은 맥락에서, 마미 이슈를 극복하고 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다
53. 새벽을 사랑한다
54. 53에도 불구하고 직장인임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 어린이 생활 중
55. 올해 학사 재입학할 예정이다. 이토록 무모하고 아름답고 용기있는 나 ~~~ () 
56. 꾸준히 달리기를 한다. 
57. 꾸준히 요가를 한다. 
58. 회사에서 아방수 신입 포지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고 있다. 이것은 정시출근 칼퇴 한다는 뜻 그러나 1인분은 하고 있다고 믿어요?
59.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 두 개를 가지고 있다. 두 개 간의 스위칭 잘 하는 편
60. 여행을 좋아했다.

61. 남들이 잘 안 가 본 국가들에 가 본 경험이 있다. 요르단,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그리스 이런 곳
62. 넓은 시야를 가지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인풋을 최대화하려 한다.
63. 꾸준히 영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한다. 제3외국어도 공부하고파!
64. 영어와 러시아어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려 노력한다. 
65. 그래서 치우치지 않은 사고를 가지려 노력하고 있다.
66. 테크노 여전사로 데뷔할 준비가 되었다. 
67. 화끈하다. 어떤 행동을 할 때 망설이지 않고 행동으로 옮기기 가능 
68. 타인의 멋짐에 쉽게 감회된다. 
69. 누구든 존중할 줄 안다. 물론 나를 존중해 주지 않는 사람은 존중하지 않게 된다. 
70. 노래방에서 모든 장르의 노래 부르기 가능. 오페라 넘버도 가능. 

71. 정직하다. 아첨 아부 못 한다. 마음에 없는 말 못 한다.
72. 그러나 사회적 자아와 함께라면 마음에 없는 말은 못 해도 관심 없는 말은 적당히 잘 맞장구칠 수 있다.
73. 종로구에 살았던 경험이 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창경궁 창덕궁과 광화문 교보문고 그리고 우리 학교!
74. 별 알바를 다 해봤다. 스키장 리프트 알바도 해봤다. 네~ 폴스틱 조심히 들어주세요~ 다리 들어주시고 안전바 내리실게요~
75. 속독의 왕이다. 책을 죤 빨리 읽는다. 근데 금방 까먹는다. 
76. 타자가 빠르다. 게임 채팅과 버디버디로 다져진 실력 
77. 말보다 글이 편하다. 글로 내가 원하는 바를 조리 있게, 감정 담아, 잘 표현할 수 있다. 
78.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내게 미치는 영향에 둔감하다. 연습 중
79. 대학 다닐 때 술 먹고 수업 째고 출튀하고 청강도 해 보고 암튼 다 해 봄 ! 금잔디에서 낮잠도 잤다.
80.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듣는다. 

81.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82. 러시아어로 싸움 가능하다. 개빡치는 일상의 순간들에서 따지고 들 줄 안다. 러시아어로 말싸움 이겨본 적 있다.
83. 그러나 대개의 경우 품위 및 사회적 체면 유지에 충실한다. ^.^
84. 술을 마시면 용감해진다. 
85.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필요할 때는 용감해진다. 물론 엄청난 노력을 필요로 한다.
86. 눈치가 빠르다. 남들을 파악하는 데에 그만큼 큰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지만 눈치 없게 굴어 불이익 보지는 않는다.
87. 나에게 주어진 기회들을 잘 캐치하는 편
88. 여러 백그라운드의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다. 국적 불문 성별 불문 나이 불문 
89. 카우치서핑을 해 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아주 즐거웠다.
90. 스스로의 브랜드를 운영해 본 적 있다. (@dysha_kr 현재는 잠정 휴업중)

91. 회사에서 딴 짓을 걸리지 않고 잘 할 수 있다. 지금도 이거 쓰고 있다.
92. 나의 상태에 대해 잘 설명할 수 있다. 물론 가끔은 말이 나오지도 않을 만큼 이상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93. 타인의 사정에 대해 헤아릴 줄 안다.
94. 그러나 동시에 매우 이기적이다. 난 내가 젤 중요한데 이게 단점이자 장점이라 생각한다.
95. 나와 친해져 가고 있다.  

96. 운이 좋다. 대개의 경우 운이 좋았었다고 생각한다. 
97. 같은 맥락에서 인복이 좋다. 꼭 한 번씩 좋은 일이 생긴다! 타인 덕분에!
98. 살아 있다! 그것도 러시아에서 ! 잘 !
99. 평화를 사랑하고, 나에게 주어진 평화에 감사하고, 모두에게 평화가 주어지기를 늘 바란다. 
100. 아주 멋지고 아름다운 타투들이 있다 ^-^ 궁금하시다면.... 더보기

우스갯소리로 늘 독일에선 강아지가 외국인보다 우선순위라는 농을 한다. 이 농은 내가 외국인으로 어딘가에서 존재하는 순간 나는 그냥 그 곳에서 살아가는 임주리가 아니라 외국인 임주리가 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인종과 성별을 떠나 한국 밖에 존재하는 순간 나는 어떤 다른 사람이 된다.

이센스의 새 앨범 <이방인> 중 김심야가 피처링한 <clock> 이라는 노래가 있다. 거기엔 이런 가사가 있다.

/그리곤 다 내려놓고 먼 곳의 어느 도시에
서울과는 다른 밤과 다른 표정에
섞여 살고 싶어 내가 살기에 여긴 불편해
허나 도피의 끝에 새 땅은 없지 늪이야
난 깊숙히 내 기둥을 꽂을 준비하지
그 수표에 적힌 평온의 값
그게 얼마든 줄테니까 내게 삶을 내놔/

오래간 기다리던 이방인 앨범이 나오자마자 이 부분만 몇 번이고 계속 돌려 들었다. 서울을 끔찍하게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어떻게든 서울로 돌아오는 이유는 이 가사와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내 홈그라운드. 내가 온전한 언어로 완전한 한 명의 사람으로 서 있을 수 있는 곳이기에 나는 외국에 있는 동안 서울을 끊임없이 회피하면서 결국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를 무수히 바라기를 반복한다. 서울에서의 삶이 싫다. 이 곳에서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가 없다. 서울과는 다른 밤을 살고 싶다. 그렇지만 그 곳에 내가 오롯이 존재할 땅은 아주 좁거나 그냥 없기도 하다.

해외에 오래 나가 있던 건 아니지만 남한에서 왔냐 북한에서 왔냐는 말은 이제 어디에서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웃으면서 김정은 사촌이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짬을 갖추는 동시에 너덜한 마음을 벼리는 법도 알게 됐다. 그러나 이방인으로서의 삶이 가장 고단한 건 결국 내가 어떻게 노력하든 그들의 생활에 녹아들어가지 못한다는 걸 깨달을 때다. 그들의 언어를 잘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되는 건 아니다. 도리어 어 너 외국인인데 우리말 잘 하네? 어디서 배웠어? 라는 기분 좋지만 불쾌한 칭찬을 받는다. 말을 잘 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될 순 없다. 물론 이건 내 외국어 실력이 정말 원어민 만큼은 아닌 탓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한국 말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걸 90만큼 표현한다 치면 러시아어론 그걸 반도 못 말한다. 친구들과 대화할 때 생각이 원하는 형태로 발화되지 않는 것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건 퍽 절망스러운 일이다. 마음대로 배출되지 못하는 생각들은 결국 내부에 고이고 그걸 토해내기 위해 아무리 많은 작업을 해도 결국 찌꺼기가 내 안에 남는다. 그 찌꺼기가 쌓여 다른 생각조차 못 나가게 막고 그것에 결국 우울해지는 거다. 그러니까 해외에서 산다는 건 이렇게 절망스러운 게 되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서울에서 영원히 이방인이 될 수 없다. 내가 싫어하는 한국인의 모습들 그리고 성향들을 문득 내게서 발견할 때 나는 해외에서 느낀 절망감의 곱절을 느낀다. 내가 싫어하는 부모님의 면모를 닮는 것과도 비슷한 기분이다. 싫어하고 내가 그렇게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에 형성된 내 성정. 빠르지 못한 서비스를 규탄하고, 거시적인 문제를 작은 것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는 소시민적 면모를 가지고, 어쩔 수 없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을 떼어놓지 못하는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나를 한국인으로, 서울 사람으로 만든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이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부끄러운 건 아니다. 다만 나는 이랑이 <신의 놀이> 일 절에서 던지는 물음들을 스스로도 던지고 있는 거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것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나. 서울의 파괴적인 면모들을 미워한다. 한국인들에게도 내재된 그런 면모들이 내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것들이 너무 내 것인 점도 잘 알고 있다.

나는 기꺼이 절망스러운 이방인이 될 것 같다. 조금은 덜 절망스러운 이방인이 되기 위해 부단히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나를 끼워넣으면서.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퍽 즐기니까 그 곳에서는 영원히 이방인으로 남는 것도 좋겠다. 그 곳에 녹아들려고 애쓰는 대신 내가 느끼는 절망을 양분으로 바꾸어 낼 능력을 가지려고 애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어쨌든 결국 하나의 인격체로 설 수 있는 서울로 돌아오고 말겠지만.

그리스로 떠나기 한참 전에 내가 인스타그램에 썼던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내 여행은 항상 그와 같이 발화한다. 올해는 이렇게 썼다.

/재작년엔 그리스에 가길 염원했고 작년에 갈 수 있었다. 작년 모스크바에선 조지아에 가길 염원했고 올해 갈 수 있을 것도 같다 ! 마음 먹기 따라 다르지만 될 것 같은 느낌. 이런 계기들이 있는 적당히 건강한 삶 좋다./

나의 자발적 첫 해외여행은 유럽이었다. 가족과 같이 다녀온 일본, 고등학교 때 학교 교류로 다녀온 싱가포르 빼고 내가 모두 계획해서 이행한 것 말이다. 그렇게 철저히 도시 중심의 유럽 여행을 다녀온 이후부터는 이상하게 도시보다 자연을 먼저 찾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다녀온 첫 나라가 작년의 그리스다. 올해 내가 머무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에 3월 연휴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부터는 원래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조지아, 아르메니아까지 다녀오는 코카서스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 여유의 문제로 이것이 틀어지게 되면서 한참 고민했다. 연휴 동안 우즈벡에서 충분히 쉰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뭔가 끌리지 않았다. 사실은 답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딘가로 가야만 했다.


수능이 끝나고 시작한 첫 과외부터 해서 삼 년간이 넘게 지속적인 경제활동을 해 왔음에도 내게는 목돈이 없다. 이유는 뚜렷하다. 나는 어느 정도 돈이 생기면 그걸 늘 여행에 다 써버리기 때문이다. 다 쓴다는 말이 마음에 안 드니까 투자한다고 해야지.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한참 동안 마음 속에 간직해 두다가 어느 순간 그 곳을 갈 기회가 생겼을 때 주저하지 않고 향하는 편이다. 애초에 노후가 보장된 오랜 삶에 흥미가 없기도 하고, 그때그때의 욕망을 충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관과 부합하기에 수많은 즉발적 욕구들에 주저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내겐 더 좋기 때문이다.

코카서스 3국을 모두 포기하기에는 어쩐지 내키지가 않았다. 일을 하면서도, 일을 안 하면서도 계속 어느 곳을 가야 할까 생각하며 인터넷 창을 켜서 아제르바이잔 여행, 아르메니아 여행, 조지아 여행 같은 것들을 검색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것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카자흐스탄을 거쳐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간 사람들의 여행기였다. 타슈켄트에서 우르겐치, 히바를 거쳐 기차를 타고 카자흐스탄 악타우에서 배나 비행기를 타는 경로였다. 히바는 어차피 우즈벡에 머무르는 동안 꼭 가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의 목적지 중 하나로 정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럼 악타우는?

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정하는 여행지에서 벗어난 곳을 간다고 타인에게 말하면 왜 굳이 거기를 가? 라고 되물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가 거창하지 않을 때 실망하거나, 혹은 조금 이상하다(순화해서 말하면 특이하다였다)고 말하는 경우도 태반이었다. 실제로 악타우로 나를 이끈 건 사진 한 장 그리고 세련된 타이포 하나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계단 사이로 지는 노을을 보고서야 아, 악타우를 충분히 거쳐 갈 만한 메리트가 있겠다 싶었다. 우르겐치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가면 닿게 될 베이네우 역의 감각적인 간판도 한몫했다. 이렇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희한하게 이끌릴 때가 많다. 그렇지만 그게 여행의 이유가 되어서 이상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어떤 것에 이끌리든 결국 나는 향하게 되고, 향한 그 곳에서 조금 더 넓고 다른 내가 되어서 돌아오기 때문에.

결국은 또, 사무실 책상에서 나는 이상하게 이끌렸다. 히바, 악타우를 거쳐서 아제르바이잔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작년의 여행만큼 큰 설렘이 따라오진 않았지만 묘하게 잔잔한 물결들 속에 발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었다. 조금씩 나를 간지럽혀서 못내 움직여 버리게 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번 여행 내 목표 중 하나는 물에 뜨는 거였다.

맞다. 난 수영을 못 한다.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어린이 레인에서 강습을 받다 도저히 물에 푹 잠길 수가 없어서 그 날 저녁에 돌아와 울곤 다음 수업부터 안 나간 게 수영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다.

그런데 이번엔 하면 왠지 될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라 그리고 도시마다 수영하고 싶은 곳들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수영복도 세 벌이나 챙겼다. 수영복을 사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수영 연습을 할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누군가가 물과 한 몸처럼 있는 영상을 보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그래 스물 셋이나 됐는데 이번엔 정말 할 수 있을 거야. 예전보다 물도 안 무섭고.

첫번째 수영을 계획한 건 모스크바였다. 작년 교환학생 시절부터 꼭 가 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잡은 숙소 위치도 하필 그 곳과 가까워서 하루는 무조건 수영 하고 몸 말리고 반복해야지 하고 기대했다. 그러나 막 도착한 모스크바의 그 주 최고 기온은 고작 20도 남짓이었고, 그 곳에 있는 닷새 남짓한 시간 동안 네다섯 번 비가 온다는 절망적인 예보가 나를 반겼다. 어떻게 도착 이 주 전까지는 30도 정도였으면서 갑자기 그게 그렇게 떨어지지? 그나마 괜찮은 날을 골라 그 날 아침 수영 할 준비 마치고 집을 나서자마자 뼈저리게 후회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에서 수영을 하겠다는 건 미친 생각이었다.

슬픈 마음과 함께 다음 도시들을 기약했다. 아무래도 러시아가 유럽보다는 추우니 유럽에 가면 마음껏 수영할 수 있을 거야. 마침 나와 일행이 러시아에 있을 때 유럽 기온은 37~39도까지 올라가는 기염을 토했다. 당연히 계속 더울 거라 믿으면서 다음 행선지들로 향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독일 베를린 그리고 폴란드 크라쿠프. 세 곳의 기온 모두 다 우리가 갔을 땐 하루이틀 빼고 15도에서 20도 사이를 웃돌았다. 한 삼 주 남짓을 그렇게 다니니 우리가 한기를 몰고 다니나? 하는 원망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수영복을 괜히 챙겨 다녀서 짐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믿을 건 요르단과 몰타뿐이었다. 두 나라는 일 년 내내 비도 잘 안 오고 7월 중순이면 가장 더울 때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내 두 곳의 날씨를 체크했는데 다행히도 계속 삼십 도 정도였다. 직접 가 봐야 확실히 알게 될 거였지만 그래도 마음 속으로는 벌써 바닷물 수영장 물 사해까지 마구 뛰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요르단.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텁텁 화끈한 공기가 몸을 휘감았다. 더운 걸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기쁨이 앞섰다. 도착하는 그 날 사해 앞 수영장 딸린 호텔에 숙박할 예정이었기에 그랬던 것 같다. 호텔에 들어가자마자 설레는 마음으로 수영복을 갈아입고, 일단은 호텔 프라이빗 비치부터 가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사해가 바다는 아니지만 어쨌든 바다긴 바다니까. 정말 신기하게 몸이 둥 떴다. 기세를 몰아 수영장까지 점령하기로 했다. 들어가자마자 직전까지 치솟았던 자신감이 푹 꺼졌다. 까치발을 해야만 수영장 바닥에 발이 닿았다. 키가 160인 나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발 동동 구르면서 간신히 얼굴만 내놓고 있으니 내가 왜 수영을 싫어하는지 기억났다. 나는 눈 코 그리고 귀에 물 들어가는 게 너무 무서웠다. 말하자면 조건부 물 공포증인 셈이다. 물에 들어가는 순간 시야가 차단되는 것도 싫고 코와 귀에 물이 들어갈 때 느껴질 괴로움도 무서웠다.

친구는 일단 물에 눕는 것부터 시작해 보자고 했다.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누우면 물에 뜬다고 했는데 도저히 목 부분에 힘이 빠지질 않았다. 어떻게든 뒤통수가 물에 담겨서 귀가 잠기면 안 될 것 같아서 계속 허우적거렸다. 귀에 물이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들어가는 게 아니고 스치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잡아주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도무지 힘이 빠지질 않았다. 한 시간 넘게 사투한 끝에 한 손은 친구 팔, 한 손은 수영장 벽을 잡고 눕기 시작해서 수영장 벽에서만 손을 떼어놓는 것까지는 가능하게 되었으나 그 이상으로는 진전이 없었다. 아무래도 물이 깊어서 그런 것 같아. 바다에서 해 보자. 핑계를 대면서 1회전 패배를 선언했다.

며칠이 지나고 몰타. 바닷물 얕은 구간에서는 그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이틀에 걸쳐 재도전했다. 첫날은 몰타 본섬에서 가장 유명한 해변인 세인트줄리언스. 사람이 엄청 많았고 다들 물개처럼 유유히 헤엄쳤다. 심지어는 도저히 발이 안 닿을 것 같은 부분까지 들어가서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꼿꼿하게 물에 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단 얕은 부분으로 들어갔다. 친구 손을 잡고 앞으로 누워 물장구치는 것부터 시작했다. 잘만 하다가도 친구가 한쪽 손이라도 놓을라치면 기겁하면서 발을 짚고 일어났다. 그건 의도한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렇다고 뒤로 힘 빼고 눕는 건 잡을 게 없으니 더 안 됐다. 내일은 진짜 해 볼게. 그렇게 또 2회전 패배 선언.

마지막 수영은 블루 라군이 있는 코미노 섬에서였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옥색 물을 보니 여기에선 정말로 성공하겠다 싶었다. 일단 시야가 차단당할 걱정이 훨씬 적었고 물도 더 깨끗해서 괜히 안심이 됐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또 실패했다. 3연속 실패다. 친구가 계속해서 물에 뜨는 법을 가르쳐 주려 고군분투했지만 얼굴이라도 닿을라치면 그 짠 물에 엉망이 될 것 같은 기분에 움츠러들었다. 임시방편으로 팔 유로 주고 튜브를 샀다. 튜브를 끼면 수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은 튜브 끼고 있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 곳에선 애기들 말곤 다들 튜브 없이도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난 튜브 끼고도 수영 못 하는 몸치였다. 그놈의 물 공포증이 문제인지 아니면 타고나기를 수영 못 하는 몸인지 어떻게 해도 되질 않았다. 결국 답답한 마음에 물에서 나와서 선베드에 누워 책이나 읽었다.

그러니까 이번 여행에선 수영에 참패했다. 힘 빼기의 기술이라는 책을 보고 누가 수영에 성공했단 글을 봤었는데 아무래도 다음 수영 도전엔 그 책이라도 사가야 마음이 든든하지 싶다. 나는 아직도 스노클러 끼고 유유하게 바닷속 헤엄치는 내 모습을 상상한다. 언젠가는 그러고 있을 수 있을 거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쓴 사랑 이야기

마르크스주의자가 쓴 사랑 이야기라는 인스타그램 유저의 코멘트를 보자마자 어떤 망설임 없이 곧바로 책을 샀다. 그 유저가 추천해 주는 책들이 대개 내 취향인 탓도 있지만 코멘트가 정말로 내용을 궁금하게 했다. 당시 네덜란드에 있어서 영어 원서 서점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것도 구매 결정에 한몫했고.

샐리 루니의 <Normal People>은 그 제목부터 내가 해오던 고민들과 맞닿아 있다. 보통 사람.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수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이건 좋은 의미에서 내가 비범하다고 느낀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늘 내가 보통 사람의 범주에 속하는가 하고 묻는다. 중학교 이 학년 때부터 시작된 이 질문에는 좀체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나는 어떤 집단 내부에 깊게 소속되기를 아주 꺼려하면서 동시에 배제되는 것을 그만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단체 술자리를 가서 왁자지껄하게 인간 관계를 확장하는 것보다는 혼자 어두운 방구석에서 스스로를 구석으로 말아넣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다. 집단 내의 큰 무리를 싫어하면서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 것은 괜찮은 걸까 조바심내는 사람이다. 나와 내 조각들 그 조각들에 새겨진 무늬들을 아주 사랑하면서 그것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아주 먼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이건 아주 가까운 사람 중 하나에게 나의 글쓰기와 사진찍기가 쓸모없는 것이라 통째로 부정된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어떤 심리학자가 자기혐오는 자기애의 다른 방향으로의 발현이라고 했는데, 스스로를 보면서 그 말에 아주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내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멋지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오하고 이상하다고 한다. 친해지기 전 내 생각을 인스타그램으로만 접했던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다가 사실은 내가 우울하고 그걸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 때문에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그러게 정말 내가 이상한가? 하고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보통 사람인 것 같으면서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노멀 피플>에서의 마리안이 보여 주는 모습 또한 이런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시간을 뛰어넘으면서 순행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마리안과 코넬 두 남녀의 관점에서 그들 사이의 사건들을 다룬다. 둘은 작은 고등학교 시골 마을에서 만나 더블린의 대학 시절까지 계속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의 엄청난 감정과 신체 공유를 반복하면서 한 번도 서로를 애인이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그 과정 속에서 코넬은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를 맺지 않지만 마리안은 계속해서 여러 남자들을 만나고 한 번도 건강한 연애를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본인의 성향을 알게 되고

나 자신의 개인적 고민과 맞닿아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 책을 더 몰입해서 읽었지만 결정적으로 이 책에 대해 쓰려고 한 건 앞서 언급한, 사랑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시각 때문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조건은 아니지만 사랑에 있어 우리는 분명 어떻게든 자본과 계급에 얽매인다. 그리고 작가는 이 점을 굉장히 영리하게 풀어나간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이 책이 국문 번역판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렇지만 문장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에 여유가 된다면 꼭 원문으로 읽어 보길 추천한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쓴 사랑 이야기

마르크스주의자가 쓴 사랑 이야기라는 인스타그램 유저의 코멘트를 보자마자 어떤 망설임 없이 곧바로 책을 샀다. 그 유저가 추천해 주는 책들이 대개 내 취향인 탓도 있지만 코멘트가 정말로 내용을 궁금하게 했다. 당시 네덜란드에 있어서 영어 원서 서점에 대한 접근성이 좋은 것도 구매 결정에 한몫했고.

샐리 루니의 <Normal People>은 그 제목부터 내가 해오던 고민들과 맞닿아 있다. 보통 사람.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수없이 고민한다. 그리고 이건 좋은 의미에서 내가 비범하다고 느낀다든가 하는 것이 아니다. 늘 내가 보통 사람의 범주에 속하는가 하고 묻는다. 중학교 이 학년 때부터 시작된 이 질문에는 좀체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나는 어떤 집단 내부에 깊게 소속되기를 아주 꺼려하면서 동시에 배제되는 것을 그만큼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단체 술자리를 가서 왁자지껄하게 인간 관계를 확장하는 것보다는 혼자 어두운 방구석에서 스스로를 구석으로 말아넣는 것을 훨씬 좋아하는 사람이다. 집단 내의 큰 무리를 싫어하면서 그 무리에 속하지 않는 것은 괜찮은 걸까 조바심내는 사람이다. 나와 내 조각들 그 조각들에 새겨진 무늬들을 아주 사랑하면서 그것이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아주 먼 사람들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이건 아주 가까운 사람 중 하나에게 나의 글쓰기와 사진찍기가 쓸모없는 것이라 통째로 부정된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어떤 심리학자가 자기혐오는 자기애의 다른 방향으로의 발현이라고 했는데, 스스로를 보면서 그 말에 아주 동의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은 내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멋지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오하고 이상하다고 한다. 친해지기 전 내 생각을 인스타그램으로만 접했던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다가 사실은 내가 우울하고 그걸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 때문에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다 보면 그러게 정말 내가 이상한가? 하고 혼란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보통 사람인 것 같으면서 또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노멀 피플>에서의 마리안이 보여 주는 모습 또한 이런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시간을 뛰어넘으면서 순행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마리안과 코넬 두 남녀의 관점에서 그들 사이의 사건들을 다룬다. 둘은 작은 고등학교 시골 마을에서 만나 더블린의 대학 시절까지 계속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 사이의 엄청난 감정과 신체 공유를 반복하면서 한 번도 서로를 애인이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그 과정 속에서 코넬은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연인 관계를 맺지 않지만 마리안은 계속해서 여러 남자들을 만나고 한 번도 건강한 연애를 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본인의 성향을 알게 되고

나 자신의 개인적 고민과 맞닿아 있는 주인공의 모습에 책을 더 몰입해서 읽었지만 결정적으로 이 책에 대해 쓰려고 한 건 앞서 언급한, 사랑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시각 때문이다. 우리가 강조하는 조건은 아니지만 사랑에 있어 우리는 분명 어떻게든 자본과 계급에 얽매인다. 그리고 작가는 이 점을 굉장히 영리하게 풀어나간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이 책이 국문 번역판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렇지만 문장이 복잡하지 않으면서도 매혹적이기 때문에 여유가 된다면 꼭 원문으로 읽어 보길 추천한다.

누구나 여름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워낙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 탓에 나는 어려서부터 왕왕 여름이 싫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뭐야 하면 처음에는 봄이라고, 스물 하나가 되고부터는 폐에 시린 공기 들어오는 늦가을부터라고 답한 건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수순인 거였다. 나는 여름이 싫었다. 아니면 여름이 나를 싫어한 걸까? 어렸을 땐 생일이 있는 오 월 말이면 그래도 마구 덥진 않았는데 최근 몇 년간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유독 그 즈음마다 너무 더워서 진을 뺐던 것 같다. 생일이, 날씨로만 보면 여름이라는 그 사실마저 못내 속상할 정도로 이 계절에는 도저히 정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삼 년 전 여름을 위해 살아가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늦가을에서 초겨울을 살아내려고 그 다른 많은 시간들을 살아내는 것처럼 그 친구는 여름 한 계절을 살아내려 다른 계절들을 버틴다고 했다 (물론 내가 보기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계절들이 풍요로웠다). 그를 만나기 딱 반 년 전에 다른 누군가가 자기도 여름을 싫어했는데 여름을 사랑하는 친구 덕에 자기도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노라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유독 여름 싫어 맨인 내게 콱 박혀 있었던 건 아마도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이 친구를 만나자마자 내가 여름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다. 성인이 되고 첫 번째부터 세 번의 여름을 함께 지내면서 차근차근 여름에게 정을 쌓아간 것 같은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건 작년 여름의 기억들이다. 한강에서의 하루와 태안으로의 로드 트립 그리고 네 평 자취방에서의 어떤 고요한 밤. 거기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태안 로드 트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날 하나가 여름에 대한 내 마음을 완전히 좋은 쪽으로 돌려놓은 것 같다고.

발단은 신두리 사구 때문이다. 갑자기 신두리 사구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전 주 주말인가에 뜬금없이 시간 있으면 우리 태안에 갈래? 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만큼 내가 너를 이유없이 따라간단 얘기야, 하는 말과 함께.

태안 가던 당일 나는 밤을 샜고 잔뜩 피곤에 절어 아침 일찍 버스를 탔다. 거봉과 잔뜩 물러 버린 무화과 스피커 필름 카메라만 배낭에 때려넣은 조촐한 차림이었다. 잠을 쫓기 위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고 태안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터미널 맞은 편 파리바게트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고 발견한 무알콜 샴페인에 우리는 여름 기념엔 꼭 이게 있어야겠다 싶었다. 옆 다이소에서 돗자리와 플라스틱 와인 잔을 사곤 다시 해수욕장까지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탔다.

물 빠진 바다 어디에 돗자리를 깔아 두고 너무 마음에 드는 색들을 서둘러 찍었다. 미지근한 과일들과 싸구려 무알콜 샴페인은 여름을 기념하기엔 차고 넘쳐서 결국 내 마음까지 채웠다. 점점 차는 물에 우리는 몇 발짝씩 뒤로 무르면서 돗자리에 앉아 있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접었다. 수영복 입고 간 나는 시원하게 몸을 적셨고 그 상태로 신두리사구까지 걸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덥고 습한데 그 사이로 부는 바람에 행복했다. 햇볕이 심하게 내리쫴 우산을 쓰고 걸으며 본 신두리 사구도 계속 기억에 남아 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쏜애플의 노래 세 곡을 반복재생시켜두고 잤고 그 탓에 몽중에도 기타리프가 가득했다. 자다가 깼을 땐 아주 커다랗고 붉은 해가 막 넘어가고 있었고 그는 여름기억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졸려서 잘 안 떨어지는 입으로 웅얼거렸다. 내가 더 고마운데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붉은 하늘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 때 여름이라는 단어가 마음 깊이 박혔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풍경들이 선한 건 괜히 그러는 게 아닐 거다. 아주 나중에도 이 날을 꼽을 만큼 이 날은 내게 엄청 커다란 의미로 남아 있다. 이런 수식어를 쓰는 건 어쩌면 유치하지만 정말 엄청 커다란 날이다.

여름이 다 가진 않았지만 올해도 벌써 나름의 기억을 만들어 두었다. 요르단 와디무사와 몰타의 지중해 바다. 남들이 굳이 우선으로 두지 않는 여행지에 매력을 느끼는 내게 두 곳 모두 운명처럼 다가왔는데 신기한 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여름에 가까운 장소들이 이 두 장소라는 거다. 앞으로 이번 여행에 대해 쓰겠지만 빅토르 최를 모델로 한 레토(Лето,여름)라는 영화에서 나왔던 장면들 그리고 노래들이 오버랩된 순간들 그리고 값싼 슬러쉬를 날씨에 대한 위안으로 삼으며 잔뜩 이가 시려졌던 순간들은 가장 먼저 문장으로 남겨 두고 싶다.

이제 내게는 '여름 색' 이 있다. 여름 하면 생각나는 뚜렷한 색채들과 이미지들과 감각들이 있다. 물론 아직도 눈꺼풀 닫힐 만큼 습하고 더운 날엔 흐르는 땀과 함께 아무래도 여름은 힘들다는 생각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그 다음 순간 아 그래도 여름엔 이런 것들이 있지 하고 상기해내면서 어떤 좋음을 느낀다.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긴 어려운 종류의 감정이다. 확실한 건 이제는 여름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거다. 많이 보고 듣고 쓰고 읽고 찍고 느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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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주리입니다.

주리 씨는 나무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고 있어요? 나무가 자라는 걸 본 적이 있나? 

어떤 것을 근거로 내가 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나, 아니 그것 이전에 나무가 자라는 걸 내가 체감한 적은 있었나, 하고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말들을 둥글렸다.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망설이니 상대 쪽에서 먼저 말이 돌아왔다. 나무는 한 번에 훅 자라지 않아. 그리고 한번에 쭉 자라서 사람 보기에 좋은 것들은 대개 뿌리가 튼튼하지 못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렇게 들었음에도 아리송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리 씨가 지금 그런 나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이야. 숨이 턱 막혔다. 다른 사람들 시선 신경쓰면서 사는 삶은 결국 자기에게는 허울뿐인 삶이에요. 다른 사람 보기에 안 좋아 보이면 어때? 그런 것들에 일일히 집착하다 보면 결국 자기 모습이 자기 모습이 아니게 돼. 그러다 보니까 우울증도 오는 거야.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턱 막힌 목을 닫고 눈물 맺힌 눈으로 끄덕이기만 하는 것뿐이었다. 나를 본 지 삼 분도 안 된 사람에게 내가 어떤 사람인지 간파당한다는 사실은 신통함을 느끼기보다는 부끄러움을 온 몸 가득 뒤집어쓰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과도 같음을 느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존감도 높일 필요가 있어요. 나는 잘난 사람이다, 내가 하는데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해? 뭐라고 해도 난 흔들리지 않아,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재차 묻는 상대의 말끝이 머릿속에서 웅웅거렸다. 그 와중에도 우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아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이미 눈물이 그렁해서 숨길 수가 없었다. 괜히 커피 한 모금을 마시는 척하면서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네-에-알-겠-습-니-다. 한 자 한 자 끊어서 뱉어내는 음절들이 잘게 떨렸다. 엄지손톱으로 괜히 검지와 중지 안 쪽 여린 살만 꾹꾹 눌렀다. 울음을 참는 데에 그렇게 큰 효과는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항상 증오했다. 인터넷 어떤 매체에서 자기혐오도 자기애의 일종이라는 글을 보면서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를 혐오할 수밖에도 없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신빙성 없는 매체의 확실하지 않은 근거로도 입증될 만큼 나의 내부에서 무겁게 자리한 논리였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자기애와 자기혐오는 유리창 양 쪽으로 맺히는 물방울 같은 것이었다. 내가 나의 결들을 사랑한다고 해서 내 전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스물 셋이 되고 자존감 자신감에 대해 부쩍 자주 말해 주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항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뿌리는 아무래도 깊게 자리잡지 못한다. 어쩌면 이미 깊게 자리잡은 자기애의 뿌리를 계속 자기혐오로 오독해왔던 것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 그랬다. 

눈물을 말리려 무수하게 눈을 깜빡였지만 코를 훌쩍이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경직된 얼굴을 계속해서 우습게 구기려 노력했다. 나는 간단하게 목례하고 그 어둡고 밝은 공간에서 한 발짝씩 걸어나왔다. 문을 나서자 낯선 개와 마주쳤다. 나와 방금 전까지 대화한 사람이 키우는 개들이 그 낯선 개가 지나가자 일제히 짖었다. 주인이 나오기 전까지 멎지 않는 울음과 사 월의 스산한 공기를 폐 끝까지 밀어넣으면서 차에 탔다. 그리고 그것들과 완전히 격리되고 나서야 고르게 숨 쉬었다. 

한두 철쯤의 긴 방황을 끝내면서 나는 내가 어쩌면 강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었고 동시에 나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을 어느 정도 갖게 되었었다. 다시 두 철이 지나고 가을 그리고 겨울. 나는 다시금 엄청나게 유약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많이 깎여 있었고.. 그래서 이게 맞나 내가 올바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고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고 고민하면서 힘들어하기도 하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헤집어 놓았고 나는 쉽게 그렇게 되었고. 그래도 웬만하면 참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나한테 좋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 왔다

그리고 최근의 나를 가장 크게 헤집어 놓은 사람이 있다 내가 그 사람을 헤집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내가 헤집히던 거였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큰 생각이 없었는데 그 사람 때문에 작년의 가여웠던 나를 생각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밑도 끝도 없는 우울에 처박혀서 외로워졌다 외로움을 느낀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서 나는 점점 더 약해지는 기분이 들어 매 순간 

그치만 추측하던 걸 확신하게 되고 정작 그걸 듣던 순간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으로는 몇십 번을 되풀이한건데도 막상 만나서 그런 말 들으니까 아무 것도 못 하지 내가 너를 좋아해도 되는 걸까 하고 그렇다고 내가 하지 않을 말을 걔가 할 것 같진 않고 진전도 없고 

모르겠고 정말

에구구 빨리 떠나기나 하고 싶다 이런 싱숭생숭함 더 못 견디겠네 뭐라고 썼는지도 모르겠다..  출국 한 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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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年代式(년대식) 邦畵(방화) 속에서 눈덩이를 던지며 사랑을 쫓던 늦은 오후에 어느새 너는 서걱이는 마른
대숲을 지나 내 곁에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무릎이 아프다고. 이젠 정말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녹슬은 편지함 속에서 울었다.
그런 밤마다 나는 어머니가 아닌 너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따뜻했던 몇 가지 기억들을.

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 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 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를 기다린다는 戀書(연서) 를 꽂아놓을 때까지. 네가 옆에 없음을 알고
戰慄(전율) 할 때까지.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
내가 감히 사라질 때까지만 네 곁에 있어 준다고 말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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