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누구나 여름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워낙 더위를 많이 타는 체질 탓에 나는 어려서부터 왕왕 여름이 싫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러니까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뭐야 하면 처음에는 봄이라고, 스물 하나가 되고부터는 폐에 시린 공기 들어오는 늦가을부터라고 답한 건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수순인 거였다. 나는 여름이 싫었다. 아니면 여름이 나를 싫어한 걸까? 어렸을 땐 생일이 있는 오 월 말이면 그래도 마구 덥진 않았는데 최근 몇 년간의 기억을 되짚어 보면 유독 그 즈음마다 너무 더워서 진을 뺐던 것 같다. 생일이, 날씨로만 보면 여름이라는 그 사실마저 못내 속상할 정도로 이 계절에는 도저히 정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다 삼 년 전 여름을 위해 살아가는 친구를 만났다. 내가 늦가을에서 초겨울을 살아내려고 그 다른 많은 시간들을 살아내는 것처럼 그 친구는 여름 한 계절을 살아내려 다른 계절들을 버틴다고 했다 (물론 내가 보기엔 여름만큼은 아니지만 그의 모든 계절들이 풍요로웠다). 그를 만나기 딱 반 년 전에 다른 누군가가 자기도 여름을 싫어했는데 여름을 사랑하는 친구 덕에 자기도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노라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유독 여름 싫어 맨인 내게 콱 박혀 있었던 건 아마도 이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한다.
물론 이 친구를 만나자마자 내가 여름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니다. 성인이 되고 첫 번째부터 세 번의 여름을 함께 지내면서 차근차근 여름에게 정을 쌓아간 것 같은데 그 중 가장 결정적인 건 작년 여름의 기억들이다. 한강에서의 하루와 태안으로의 로드 트립 그리고 네 평 자취방에서의 어떤 고요한 밤. 거기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태안 로드 트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날 하나가 여름에 대한 내 마음을 완전히 좋은 쪽으로 돌려놓은 것 같다고.
발단은 신두리 사구 때문이다. 갑자기 신두리 사구를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 나는 전 주 주말인가에 뜬금없이 시간 있으면 우리 태안에 갈래? 했고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만큼 내가 너를 이유없이 따라간단 얘기야, 하는 말과 함께.
태안 가던 당일 나는 밤을 샜고 잔뜩 피곤에 절어 아침 일찍 버스를 탔다. 거봉과 잔뜩 물러 버린 무화과 스피커 필름 카메라만 배낭에 때려넣은 조촐한 차림이었다. 잠을 쫓기 위해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고 태안 터미널에 도착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터미널 맞은 편 파리바게트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고 발견한 무알콜 샴페인에 우리는 여름 기념엔 꼭 이게 있어야겠다 싶었다. 옆 다이소에서 돗자리와 플라스틱 와인 잔을 사곤 다시 해수욕장까지 한 시간 남짓 버스를 탔다.
물 빠진 바다 어디에 돗자리를 깔아 두고 너무 마음에 드는 색들을 서둘러 찍었다. 미지근한 과일들과 싸구려 무알콜 샴페인은 여름을 기념하기엔 차고 넘쳐서 결국 내 마음까지 채웠다. 점점 차는 물에 우리는 몇 발짝씩 뒤로 무르면서 돗자리에 앉아 있다가 결국엔 포기하고 접었다. 수영복 입고 간 나는 시원하게 몸을 적셨고 그 상태로 신두리사구까지 걸으니 기분이 참 좋았다. 덥고 습한데 그 사이로 부는 바람에 행복했다. 햇볕이 심하게 내리쫴 우산을 쓰고 걸으며 본 신두리 사구도 계속 기억에 남아 있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나는 쏜애플의 노래 세 곡을 반복재생시켜두고 잤고 그 탓에 몽중에도 기타리프가 가득했다. 자다가 깼을 땐 아주 커다랗고 붉은 해가 막 넘어가고 있었고 그는 여름기억을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했다. 졸려서 잘 안 떨어지는 입으로 웅얼거렸다. 내가 더 고마운데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붉은 하늘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 때 여름이라는 단어가 마음 깊이 박혔다.
일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풍경들이 선한 건 괜히 그러는 게 아닐 거다. 아주 나중에도 이 날을 꼽을 만큼 이 날은 내게 엄청 커다란 의미로 남아 있다. 이런 수식어를 쓰는 건 어쩌면 유치하지만 정말 엄청 커다란 날이다.
여름이 다 가진 않았지만 올해도 벌써 나름의 기억을 만들어 두었다. 요르단 와디무사와 몰타의 지중해 바다. 남들이 굳이 우선으로 두지 않는 여행지에 매력을 느끼는 내게 두 곳 모두 운명처럼 다가왔는데 신기한 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여름에 가까운 장소들이 이 두 장소라는 거다. 앞으로 이번 여행에 대해 쓰겠지만 빅토르 최를 모델로 한 레토(Лето,여름)라는 영화에서 나왔던 장면들 그리고 노래들이 오버랩된 순간들 그리고 값싼 슬러쉬를 날씨에 대한 위안으로 삼으며 잔뜩 이가 시려졌던 순간들은 가장 먼저 문장으로 남겨 두고 싶다.
이제 내게는 '여름 색' 이 있다. 여름 하면 생각나는 뚜렷한 색채들과 이미지들과 감각들이 있다. 물론 아직도 눈꺼풀 닫힐 만큼 습하고 더운 날엔 흐르는 땀과 함께 아무래도 여름은 힘들다는 생각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그 다음 순간 아 그래도 여름엔 이런 것들이 있지 하고 상기해내면서 어떤 좋음을 느낀다.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긴 어려운 종류의 감정이다. 확실한 건 이제는 여름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됐다는 거다. 많이 보고 듣고 쓰고 읽고 찍고 느끼고.